후삼국 시대의 주역 견훤 궁예 왕권과 고려의 힘

    지대넓얕/혜윰 / / 2024. 2. 26.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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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 시대의 주역

    신라 말기의 사회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나라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견훤, 궁예,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이끈 주역들입니다.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신라의 군인이 되어 서남 해안을 지키는 장교로 근무했습니다.

    이때 견훤의 나이가 25세였는데요 견훤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기반으로 군사를 일으켜 완산주(전주)에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며 후백제를 세웠습니다.(900)

     

    궁예는 신라의 왕족 출신이었지만 갓난아이 때 진골 귀족들이 왕위 쟁탈전 속에서 부모를 잃어버려 유모의 손에서 어렵게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 것은 901년으로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원수를 내 손으로 갚겠다.'며 송악(개성)에서 건국했습니다.

    궁예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정치를 매우 잘해서 백성들 모두 그를 좋아했는데요 하지만 수로를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더니 점차 독재자로 변하여 끝내는 폭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궁예를 부하들은 가만 나 두지 않았는데요 부하들이 힘을 합하여 그를 쫓아내고 궁예 다음의 서열이었던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마음이 넓고 덕이 많았던 왕건은 송악 출신의 호족으로 그는 궁예의 부하로 후백제 땅인 전라도 금성(나주) 지역을 점령하는 등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궁예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궁예가 포악해져 가자 부하들의 추대로 군주가 되어 새 나라를 개창했는데요 이때가 918년으로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라 했으며 수도를 자신의 고향인 송악으로 정했습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고려의 후삼국 통일 정책은 의외로 간단했는데요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던 후백제와는 투쟁하였고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신라와는 친하게 지내 신라의 호감을 얻고자 힘썼습니다.

    이에 반하여 후백제는 고려와 대립하면서 신라에게도 강경책을 써서 수도 경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기까지 했으며 신라 사람들은 후백제의 횡포에 분노하여 고려의 포용력에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935년 후백제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자신의 지위를 막내아들인 금강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큰 아들인 신검이 반발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동생인 금강을 살해한 다음 자신의 왕이 되었습니다.

    견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금산사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몸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신라가 스스로 고려에 항복해 왔는데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이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 버렸던 것입니다.

    936년 고려는 드디어 후백제군을 상대로 마지막 전쟁을 벌입니다.

     

    왕건은 10만의 군사로 후백제군을 공격합니다.

    이 공격의 선봉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도 끼어 있었으며 견훤은 자기 손으로 만든 나라를 자기가 멸망시키는 안타까운 상황을 연출하게 됩니다.

     

    결국 고려는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이로써 10세기 전반 40여 년 동안 치열하게 다투었던 후삼국 시대는 끝이 나고 다시 한반도에 단일 국가가 들어서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른쪽)견훤릉과 (왼쪽)금산사

    후삼국 통일의 의미

    통일 신라 말기에 성장하기 시작한 지방 세력이 고려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는데 여기에 고려는 삼국의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여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또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발해인까지 포함한 실질적인 민족 통일의 완성으로 우리 민족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조 왕건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의 의미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있을 때, 수군을 거느리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 지역(전라남도 서남부 지역)을 점령해 버리는데 당시 전라도는 후백제의 땅이었는데 왕건이 후백제 땅의 일부를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후백제와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던 태봉의 입장에서 배후 지역인 나주를 점령한 것은 후백제의 전투력을 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통한 후백제의 활동을 위축시킴으로써 후백제의 힘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건이 나주에 왔을 때 나주 호족들이 적극적으로 왕건군을 도와주었다고 하는데요 나주는 후백제 땅이었기에 나주 호족들이 왕건군과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송악 호족인 왕건 집안이나 나주 호족들 모두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한 해상 세력으로 예로부터 서로 협력하며 중국과 무역을 했기에 서로 연결된 끈이 있었기에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적극 협력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도 나라와 자신의 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호족들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실시해야 했습니다.

    '정략결혼 정책'과 '사성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태조는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는 북진 정책을 추진했는데요 그가 나라이름을 '고려'로 정한 이유도 '고구려'의 옛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아 꾸준히 북쪽으로 영역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태조가 거란을 적대시한 것도 고구려 계승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건설한 거란족은 고려와 친해지려고 50마리의 낙타와 함께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태조는 사신을 유배에 처하고 낙타는 다리 밑에서 굶겨 죽였는데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태조는 민족 통합을 위해 신라와 후백제의 지배층들이 충성을 맹세하면 그들의 지배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으며 이것을 '사심관 제도'라고 합니다.

    발해 멸망 후에는 발해의 세자 대관현이 수만 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망명해 오자 '왕'씨 성을 하사하고 고려의 지배층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 불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설 등 다양한 사상이 함께 어우러지는 정책을 펼쳤으며 또한 태조는 외래 문물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되 주체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략결혼과 사성정책

    태조의 죽음

    태조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른 사람은 나주 호족의 딸인 장화왕후 오 씨가 낳은 아들이었는데요 그가 바로 혜종입니다.

    혜종 시대에는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태조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추진했던 정략결혼 정책의 후유증이 심각했기 때문이네요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조에게 딸을 시집보낸 대호족들은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였습니다.

     

    경기도 광주 출신의 호족인 왕규는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는데 혜종이 왕이 된 지 2년 만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자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난은 왕건의 사촌 동생으로 당시 서경을 지키고 있었던 왕식렴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왕식렴의 추대로 혜종의 이복동생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가 바로 3대 임금 정종입니다.

     

    왕이 된 정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의 제거에 힘쓰는 한편 수로를 서경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서경은 자신의 후원자인 왕식렴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서경으로 천도하면 왕권이 안정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인데요 그러나 궁궐을 짓는 도중에 왕식렴이 죽고 정종 또한 갑자기 죽어 서경 천도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정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정종의 동생 광종이었으며 광종은 왕권 강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먼저 본래 양인이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조사하여 모두 양인으로 풀어 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는데 이 정책은 호족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호족들의 경제, 군사적 기반이 노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광종은 또한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험을 봐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인 과거제를 우리나라 최초로 시행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습니다.

    이 제도를 통해 호족이 아니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요 광종의 이러한 정책에 호족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광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반대파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훗날 최승로가 "이때 살아남은 옛 신하가 겨우 40여 명뿐이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광종의 호족 세력 숙청 작업이 얼마나 폭넓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는데요 광종이 죽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호족들이 다시 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광종 때 만든 제도들을 무시했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적극적으로 광종의 정책을 추진했던 관리들을 죽이거나 내쫓으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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