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투하와 원폭 피해자 문제 한국의 피해자들

    지대넓얕/혜윰 / / 2024. 2. 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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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오전 2시 45분 폴 워필드 티비츠 2세 중령이 조종하는 B29 폭격이 에놀라 게이호가 2기의 동료 공군기와 함께 태평양상의 괌 북쪽 티니안섬의 미 공군 기지에서 이륙하였습니다.

     

    에놀라 게이는 조종사 키비츠의 어머니 이름으로 자신이 조종하는 B29 폭격기에 붙인 애칭인데요 그는 이날의 비밀임무를 위해 1944년 12월 편성된 제509 혼성비행대 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네바다주의 사막의 비밀 기지에서 이날의 임무를 위한 훈련을 진행했고, 이듬해 부대는 태평양상의 티니안섬으로 이동했습니다.

    제509 혼성비행대는 펌킨 폭탄이라는 모의 폭탄을 사용해 교토, 히로시마, 니가타, 기타큐슈 등을 폭격하며 이날을 위해 연습했습니다.

     

    이날 실제 투하하는 장소는 상부에서 히로시마로 선정했습니다.

    히로시마는 혼슈 서부의 근대산업 중심도시로서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39~1905) 및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등 침략전쟁에서 핵심 역할을 한 대표적 군사도시였습니다.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에는 인류 최초로 투하하는 원자 폭탄이 실려 있었고, 따르는 두 대의 공군기 중 한 대는 촬영, 다른 한 대는 과학적 측정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B29는 북쪽 일본 본토를 향해 7시간을 비행하여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시 상공에 도착했습니다.

     

    일본군은 3대의 미 공군기가 일본 본토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고 공습경보를 울렸다가 곧 취소하였습니다.

    대응 전투기 발진도 하지 않았습니다.

    항공기 3대의 편대가 위협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요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은 목표 지점 도착 30분 전에 폭탄의 안전장치를 제거했습니다.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하여 고도 9750m에서 인류 최초의 핵무기인 '리틀 보이'를 투하했습니다.

    투하된 폭탄은 57초 뒤 자동 폭발 고도에 도달하여 히로시마 상공 580m에서 폭발하였습니다.

    은백색 섬광이 번쩍하고 빛남과 동시에 폭풍이 몰아쳤으며 고열로 인해 시가지에 화재가 발생했고, 버섯구름이 18km 상공까지 치솟으며 태양을 가려 깜깜한 어둠이 한동안 히로시마 일대를 뒤덮었습니다.

    원자폭탄 폭발 후 시가지를 뒤덮은 먹구름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6km 이내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반경 3.5km 안, 총면적 11㎢가 피해를 입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건물의 90%가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으며 히로시마 인구의 약 25만 5000명 중 7만 명이 초기 폭발 때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 방사능 피폭으로 또 그만큼의 숫자가 죽어갔으며 모두 12만 6000명의 민간인 약 2만 명의 군인 억류 중이었던 전쟁포로 1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에도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사망과 질병은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흘 후인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일본의 해군기지이며 미쓰비시 중공업을 위시한 조선업과 방위산업 중심지 나가사키에 떨어졌습니다.

    약 6만~9만 명의 민간인, 150명 이상의 군인, 8~13명의 연합군 포로가 4개월 이내에 사망했으며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 12만 9000~22만 60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왼쪽: 히로시마, 오른쪽: 나가사키)
    1945년 8월 6일 원자탄으로 파괴된 히로시마의 돔 건물(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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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원자폭탄 피해자 

    1945년 8월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7만, 나가사키에는 3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 또는 취업, 학업 등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약 5만 명이 원폭으로 인하여 그 연말까지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생존 5만 명 중 4만 3000여 명이 남한으로, 약 2000명이 북한으로 귀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된 회원은 4966명으로 이중 사망자는 3089명이며 현재 회원은 1877명입니다.

     

    등록하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으므로 한국인 원폭피해자 중 생존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들이 낳은 자녀 중 약 7500여 명이 살아가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원폭피해자는 직접피폭자, 입시피폭자, 사체처리 및 구호종사자, 태내피폭자 등으로 분류되는데 직접피폭자는 1945녀 8월 6일 히로시마 또는 8월 9일 나가사키의 일정구역에서 직접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사람입니다.

    입시피폭자는 원자폭탄 투하 후 2주 이내에 히로시마 또는 나가사키의 일정구역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사체처리 및 피해자 구호 종사자는 원자폭탄 투하 당시 또는 그 후 사체처리, 피해자 구호 등에 종사하여 원자폭탄 방사능의 영향을 받을만한 상황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태내피폭자는 위 사람몸속의 태아였던 사람으로 히로시마의 경우 1946년 5월 31일 이전 피폭자에게서 출생한 사람, 나가사키의 경우 1946년 6월 3일 이전 피폭자에게서 출생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도에 가서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원폭피해자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조사한 <원폭피해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1. 히로시마시가 1988년에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피폭자 수 46만 2924명 중 40.9%는 그해 연말 사이에 사망했고, 생존자는 55%였습니다.
    2. 90.12~91.1 기간에 보건소 등에서 현지 면담조사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피폭자의 92%는 히로시마에서 8%는 나가사키에서 피폭되었습니다. 일본인의 경우 이 비율은 61.7%대 38.3%로 현격하게 다릅니다. 강제동원, 취업, 학업 등을 위해 히로시마에 더 많이 모여 살았던 결과로 보입니다.
    3. 우리나라 피폭자의 97%는 직접 피폭자이며, 일본인의 경우 63%였습니다. 입시피폭은 1.3%이며, 일본인의 경우는 27.5%입니다. 한국에서 가족단위로 히로시마에 이주하여 피폭지 밖에 일가친척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4. 조사 대상자 1828명의 피폭 시 직업을 보면 36.7가 광산, 공장, 건축, 농사 등 육체노동 종사자였으며, 학생이 23.2% 미취학 자녀가 21.4% 군인이 3.3% 주부와 기타 무직이 15.4%였습니다.
    5. 피해자들이 일본으로 가게 된 사유를 보면 징용징병 16.2% 직장 학업 8.9% 친지방분, 부모나 가족 따라 등이 74.9%였습니다. 즉 군수공업 도시 히로시마에 먹고 살길을 찾아 가족 단위로 이주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6. 조사 당시의 거주지별로 보면 1982명 중 43.8%인 869명이 경남으로 가장 많으며, 부산 13.8%, 대구 10.5%, 서울 10.1%, 경기 7.6%, 경북 4.4%입니다. 나머지 지역은 1%대 또는 그 이하로 나타났습니다. 가장 많은 경남의 896명 중에서 합천군에서만 578명이어서 경남의 64.5%, 전체의 29.3%를 차지하였습니다.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가지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있는 원자폭탄 ‘팻맨’

    경남 합천 피해자들

    1940년대 히로시마에선 '한국인을 만나면 고향을 묻지 마라. 어차피 합천 사람이니까'라고 할 만큼 합천 출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강제징용, 근로정신대 등으로 일본에 간 합천 사람 대부분이 히로시마로 갔다고 하며 피폭자의 절반 이상은 1945~1946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생존한 경우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후유증이 화상, 타박상, 위장장애, 배변곤란, 두통, 신체기형, 빈혈, 백혈병, 시각장애, 백내장, 심장 허약, 언어 호흡장애, 신경통, 탈모증 등 다양한 양상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1966년 10월 경남 합천에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원폭 피해자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국내 유일한 곳으로 피폭 후유증이 심한 사람은 이미 모두 사망했고, 후유증이 덜하지만 각종 노인성 질환을 앓는 피해자 100여 명이 남아있습니다.

    건립비용 40억 엔 전액을 일본 정부가 대한 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했으며 한국 정부는 운영비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최대 11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복지회관 뒤뜰엔 숨진 원폭 피해자 1055명의 위패를 모신 위령각이 있습니다.

    1977년 일본 시민단체 태양회가 세운 것으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진 8월 6일에 해마다 위령제가 열리는데, 2010년까지는 위령제 비용도 태양회가 부담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무기는 지금부터 8월 10일 사이에 일본을 상대로 사용될 것이다.
    나는 전쟁부 장관인 스팀슨에게 군사 목표물과 군인과 선원들이 목표물이 될 것이며, 여성과 어린이들이 목표물이 되지 않도록 사용하라고 말했다.
    비록 일본인들이 야만인이고 무례하며 무자비하고 광신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세계의 지도자로서 보편적인 복지를 위해 일할 것이며, 폭탄을 옛 수도 '교토' 나 새 수도 '도교'에 그 무서운 폭탄을 투하할 수 없다.
    그 점에 있어 그와 나는 의견이 일치했다.
    목표는 순전히 군사적인 것이 될 것이다.

    원폭 투하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일본군으로 인해 미군이나 일본 군인과 국민의 희생을 막고 전쟁을 일찍 끝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15년간 만주, 중국내륙, 하와이를 비롯한 동남아, 태평양지역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하여 피와 공포와 살육의 전쟁을 확대해 온 일제의 침략행위에 눈 감고 원폭 피해만 부각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을 알면서도 우리 역사와 사회 일각에 단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원폭 희생자가 되고 피폭자가 되어 고통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폭 투하 후 거리의 노인과 어린이들
    (왼쪽)원자병 환자, (오른쪽) 폭심에서 2㎞ 떨어진 곳에서 입은 원폭 화상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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