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가슴아픈 이야기

    오즈의맙소사/TV스타 / / 2024. 4. 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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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픔을 잊기 위해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2년 이 지난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손기정 집안은 찢어질 듯 가난했는데요 달리기를 잘했던 그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자갈길을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런 어느 날 강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본 손기정은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했던 그가 비싼 스케이트를 사서 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는데요 이후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달리기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손기정의 어머니는 달리기 하는 아들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신발도 헐거운 큰 고무신을 사주곤 했습니다.

    손기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끼줄로 고무신을 꽁꽁 묶고 달렸는데요 그의 어머니도 결국 학교 운동회 달리기에서 일등을 도맡아 하는 손기정을 본 뒤 생각을 바꾸고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인 학생들은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집안 형편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는데요 손기정은 사정이 더 어려워 학교를 다닐 때부터 일을 해야 했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 꽁꽁 언 손을 불어가며 군고마와 군밤을 팔았으며 허드렛일을 하고 인쇄소에 취직도 했습니다.

    하지만 손기정의 손에 쥐어지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손기정은 일본으로 가기로 맘먹습니다.

    " 이렇게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안 되겠다. 일본으로 건너가야겠다! "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손기정은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운동을 했습니다.

    2년여 가량의 일본 생활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는데요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도 아니었고 결국 손기정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첫 우승

    고향으로 돌아온 손기정은 평안북도 대표로 여러 달리기 대회에 참석하는데요 그러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1931년 서울에서 열리는 조선신궁대회 5,000m 달리기 경기에서는 2위를 차지하는데 이 대회에서 그는 마라톤 경기 선수들을 보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 저 사람들은 얼마나 먼 거리를 달리는 겁니까? "
    " 백리를 달린 다오, 백리. "
    " 백리라면 4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아닙니까? 그런 달리기 종목이 있습니까? "
    " 마라톤이라오. "

    마라톤이라는 종목을 알게 된 손기정은 자신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마란톤대회였는데요 이 대회에서 그는 2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덕분에 육상으로 이름을 날리던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그는 각종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기 시작합니다.

    베를린에 가다

    손기정은 1935년 열린 베를린 올림픽 일본대표 선발전과 메이지신궁 체육대회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데요 메이지신궁 체육대회에서는 세계 신기록까지 세웠습니다.

    하지만 메이지신궁대회 시상대에 오른 그는 눈물을 흘리는데요 애국가 대신 일본의 국가가 운동장에 올려 퍼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신문에는 '표창대 위에 올라선 손 군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스탠드의 관중이 부르는 국가에 묻혀 조용히 눈물짓고 있었다.'라는 내용이 실리는데요 큰 규모의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해도 그는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조국의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1936년에 손기정은 남승룡과 함께 일본 마라톤 대표에 뽑혀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는데요 나라를 잃은 처지였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손기정과 남승룡을 비롯한 일본인 대표 선수들이 탄 열차는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달렸는데요 신의주를 거쳐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도시와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합니다.

    일장기, 올림픽 우승

    1936년 8월 9일 드디어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데요 그곳에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도 있었습니다.

    손기정은 '손기테이'라는 이름으로 일장기를 달고 출전을 하는데요 42.195㎞를 달리는 동안 발은 퉁퉁 부어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있는 힘을 뛰었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자로 들어오게 됩니다.

     

    '2시간 29분 19초 2'

     

    손기정 선수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감격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곧 깊은 슬픔이 밀려오는데요 일장기를 단채 월계관을 쓰고 우승 메달을 받아야 했으니 말입니다.

    손기정의 우승은 우리 민족에게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베를린 올림픽은 독일의 나치 정권을 이끈 히틀러가 자기 민족의 우월성과 나치의 권위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연 대회였는데요 그런데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경기에서 유럽계 백인이 아닌 이른바 유생 인종이 유승하는 바람에 히틀러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은 손에 든 월계수 나무로 일장기를 가렸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일본 국가를 들어야 했는데요 그의 얼굴에서 우승자의 기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경기가 끝난 후 외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당당히 한국 선수임을 알립니다.

    " 나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입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며칠 후 국내에 있던 신문사들은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당시 3위)가 이룬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바빴는데요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일장기를 흐리게 해서 사진을 내보냈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아예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으며 이 일로 조선 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의 문을 닫게 했습니다.

    동아일보도 얼마 동안 신문을 내지 못하게 했으며 뿐만 아니라 손기정 선수도 손에 든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렸다는 이유로 경기에 나갈 수 없게 되었으며 일제의 감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국 마라톤을 위해

    1945년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은 뒤 손기정은 '조선마라톤보급회'를 만들어 후배 마라톤 선수들을 길러냈는데요 그가 길러낸 서윤복 선수가 1947년 미국에서 열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가 태극기를 달고 처음으로 참석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인데요 손기정은 마치 자신이 우승한 것처럼 기뻤는데요 보스턴 하늘에 일본 국기가 아닌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감격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며 한국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는데요 또 전 세계에 한국을 널리 알렸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손기정처럼 일제의 탄압으로 고통스럽게 살았던 한국인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청동 투구는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어지던 것인데 손기정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베를린 박물관에 50여 년간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을 기념하여 손기정에게 전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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