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를 긍정하는 사람은 긍정하겠지만, 싫어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하고 부정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승만을 빼놓고 대한민국 건국 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업적은 상당히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건국 지도자의 기념 조형물을 건립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데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국부로 추앙받고 있으며, 중국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는 마오쩌둥의 초상이 걸려 있지만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세계 120여 국가 중 건국 지도자의 기념조형물이 없는 유일한 나라였다가 2011년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건립되게 되었지만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해서는 안 될 3선 개헌을 무리하게 밀어붙였으며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뒤 불행을 자초하고 4.19 혁명으로 물러난 대통령이 되었기에 이승만을 평가하는 시각의 골은 여전히 깊다고 볼 수 있는데요 3선 개헌과 3.15 부정선거만 하지 않았다면 4.19 혁명도 없었을 것이고 5.16 군사쿠데타도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모습만을 본다면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으로 불리기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였고 당시의 국제정세를 잘 알아차려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과정도 결코 불법적이지 않았고 민주주의 씨를 잘 뿌려 한국이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해 조금 알아보려고 합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제헌국회를 이끌며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주도했는데요 제헌국회의 다수가 의원내각제를 선호했으나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됩니다.
헌법, 민주주의, 대통령제, 반소련, 반공산주의, 자유경제 등 대한민국의 골격과 방향이 그에 의해 결정되다시피 했습니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음력 2월 19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과 어머니 김해 김 씨 사이에 늦둥이 5대 독자로 태어났는데요 그의 집안은 양녕대군 후손이나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 이경선은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며 풍수지리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여 어머니의 삯바느질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중력이 뛰어났으며 친척이 하는 서당에 다녔으며 12살(1887) 때부터 19살(1894) 과거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매년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을 거듭하게 됩니다.
과거 길이 막히자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며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과 기독교를 접합니다.
1898년 23살 때 독립협회의 연사로 만민공동회의 대중 앞에서 연설하며 청년 개혁가 이승만은 절대군주의 꿈을 갖고 정국 주도권은 놓고 싶어 하지 않았던 광무(고종) 황제와 대치하며 42일 동안이나 철야시위를 이끈 끝에 황제를 굴복시키고 의회 설립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그러나 고종이 기피하는 박영효를 독립협회가 개혁정부 각료로 추천하자 고종은 독립협회와 갓 설립된 의회(중추원)를 폐쇄하고 이승만 등을 투옥하게 되는데 이승만은 어설프게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의 위기를 넘기고 무기수가 됩니다.
이승만 석방되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승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석방운동을 펼치게 되는데요 그런 여러 도움 덕분에 감옥 안에서도 도서실을 차리고 비교적 자유롭게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으며, 집필과 독서,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40여 명의 죄수와 심지어 옥리까지 개종시키며 평생의 동지들을 얻게 됩니다.
1904년 8월 9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도움으로 5년 7개월 만에 석방 결정을 받게 되는데 그는 잠시 YMCA에 관여하다 11월 4일 유학과 민영환 등의 밀사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30세 나이에 미국 상원의원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헤이(John Milton Hay), 8월 4일에는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면담함으로써 국내외에 전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여 2년 만에 학사학위,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1910년 3월)와 거의 동시에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학위(1910년 7월)를 받았는데 12년 걸릴 학위과정을 5년 반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파송될 선교사 겸 교역자로 특별히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졸업식에서 나중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총장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19년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1년 반 가량 YMCA에서 종교, 교육활동을 하다 1912년 3월 105인 사건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미국에서 경성감옥 동지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정착했으며 그는 감리교 부속 한인 중앙 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였으며 <태평양 잡지>를 창간했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하여 숯 사업도 했습니다.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이승만,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리에 파견하기로 했지만 미국 여권을 얻을 수 없어서 좌절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3·1 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각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게 되는데 이승만은 3월 21일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 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4월 23일 경성의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4월 13~15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 자유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라고 연설했다고 전해져 있습니다.
1919년 9월 각지의 임시정부가 통합되면서 이승만은 상해의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게 되는데 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며 1920년 6월까지 ‘대한 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 활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의 부임을 여러 차례 촉구하게 되고 1920년 12월 이승만은 상해로 왔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이동휘·여운형 등과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외교와 실력양성에 기초를 두었는데요 그는 한국이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통해 승리할 수 있는 물리력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독립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실력을 갖출 때까지 준비를 하며, 미국과 일본 간 전쟁이 날 때를 기다려야 하며, 그전까지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대한 청원과 여론을 향한 선전 외교에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무장독립전쟁과 의열투쟁에 부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이승만의 외교는 미국의 이해에 기초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도록 하는 데 두었는데 그리하여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정한경과 “연합국 측이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 한반도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중립적 상업 지역화하여 완충국으로 만들 것을 청원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3월 3일에 발송합니다.
이 문서를 발송한 후 3월 9일경 미국에 3·1 운동 소식이 전해졌고 이승만과 정한경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언론에 공개합니다.
3·1 운동으로 독립의식이 크게 고조된 상황에서 이승만의 ‘위임 통치론’은 상해의 신채호 등으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요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미국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문제 등과 함께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 이름으로 활동하는데 임시정부는 구미외교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였으며,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 줄을 차단하게 되고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러는 동안 임시정부 내에 이승만 비판세력도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승만 리더십
1932년 11월 10일,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합니다.
그는 1933년 1월 26일 제네바에 도착하여 국제연맹에 대한독립청원서(大韓獨立請願書)를 제출하였고 그가 제네바에 머물던 2월 21일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나는데 그녀는 비엔나대학 어학 박사로서 통역 겸 준외교관으로 국제연맹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욕에서 결혼하고 하와이에 정착합니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출간했는데요 이 책에서 이승만은 향후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을 예견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처음엔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책은 발간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베스트셀러가 되게 되죠.
미국과 일본이 전쟁 상태에 돌입하자 이승만은 위임 통치론을 접고, 임시정부 승인 운동에 주력합니다.
그는 일본의 패배를 예견하고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미국에 경고하며, 반소 전선 구축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했습니다.
1944년 6~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며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을 통해 일제가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1942년 9월과 10월 이승만은 미국 육군 전략 사무처(OSS, CIA의 전신)에 항일 게릴라 조직을 제의하여 12명의 한인이 선발돼 12월부터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이승만은 만약 미국 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거듭 경고하였습니다.
미 국무성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자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2개월이나 발이 묶여 있게 되는데요 이승만은 도쿄를 거쳐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합니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첫 방송연설을 했습니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습니다.
단독정부수립안
1945년 12월 26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이승만과 김구 등 민족주의자들은 신탁통치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미군정에서 일하는 한국인과 모든 노동자들의 파업을 촉구하며 전국적으로 반대 시위에 나설 것을 독려했습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2월 29일 긴급 국무위원회를 열어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신익회 명의의 반탁 포고문을 통해 군정 산하기관 및 직원들을 임시정부가 접수하여 통치한다고 선언합니다.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단호히 저지했는데요 하지가 김구를 소환하여 '다시 한번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 고 하자 격분한 김구는 자살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결국 김구는 파업 중지와 복업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지만 임정은 반탁운동의 민족주의 정서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임정 세력이 반탁운동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되자 김구는 1946년 1월 4일 과도정권을 세우기 위해 비상 정치회의를 소집한다고 발표하지만 비상 정치회의는 연대할 수 있는 정당, 사회단체의 폭이 제한되어 있었고 우익 중심인 데다 그나마 이승만과 한민당이 제외되었으며 미군정과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 성공 가능성은 매우 적었습니다.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회담에서 미군정은 개별적인 정당&사회단체와 교섭하는 대신 남북의 대표기관을 통해 협의하자고 제안합니다.
미군정은 민주의원을 남한 대표로 삼아 북한 대표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이 될 대표 명단을 작성하도록 할 계획이었지만 소련 측은 반탁에 참여한 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키려 했으며, 대표조직의 수를 인구비례에 따라 선출하기보다는 동수로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공전만 거듭하게 되는데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예견하고 1946년 4월 15일부터 6주간 지방순회 반탁, 반공 강연회를 개최하여 전국에 지지기반을 확보합니다.
이승만은 "당파적 차이를 버리고 신탁통지 반대와 민족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자"라고 호소하고 "공산주의는 콜렐라와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와 협력하거라 타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며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 수립을 찬성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승만의 지방순회강연은 국민정서를 반탁과 반공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독촉 국민회 지부들이 전국적으로 결성되어 지방의 좌익 조직력을 극복하기 시작합니다.
이 기간 동안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지도자들은 간헐적인 지방순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이승만을 우익의 최고지도자로 인정하며 우익진영의 위계질서가 이승만, 김구, 김규식 순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승만은 모스크바 협정이 준수되는 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얄타 비밀협정 공개, 반탁, 모스크바 협정 폐기, 단정 선전을 목적으로 도미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합니다.
1947년 5월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또다시 아무런 성과 없이 8월에 결렬됨으로써 이승만의 단정론에 힘을 실어주게 되는데요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6월과 7월 초에는 성공 가능성을 보이면서 이승만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승만의 가장 강한 지지기반이었던 한민당이 6월 초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결정했으며, 김구의 한독당 역시 분열되어 일부가 민주 한독당을 창당하고 참가를 결정하는데요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은 김구와의 협력하에 격렬한 6.23 반탁 시위를 주도하지만 성공적인 시위는 되지 못합니다.
미국은 9월 17일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할 것을 제안했고, 26일 소련은 1948년 말까지 미·소 양군을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은 이승만이 1946년 말부터 주장해온 것이 실현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대한 정책이 이승만 노선과 근접해 있음을 의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남한만의 조기 총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는 김구는 다시 갈등 관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승만은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하므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해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구는 미·소 군대를 철수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제안하고 김규식과 연대합니다.
결국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은 3월 1일 우선 가능한 지역에서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하는 결정을 공표합니다.
대다수 우익단체들은 선거를 지지했으나 좌익집단은 선거 저지 투쟁을 벌였고, 제주 4.3 사건은 가장 극단적인 무장 폭동이었습니다.
김구, 김규식 등의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남한 단선 반대와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는데요 김구,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한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고 평양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통일정부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결국 정치적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1948년 5월 10일 한국 최초의 민주적 선거가 치러지는데요 제헌국회는 5월 31일 첫 회의에서 이승만을 189대 8로 국회의장으로 선출합니다.
7월 17일에는 제헌헌법을 공포하였고 7월 20일 헌법이 규정한 대로 국회에서 구회의장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이승만은 180표를 얻었으며 김구는 13표를 얻는 데 그치게 되었고 부통령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추천한 이시영이 당선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법석을 총리로 임명하여 초대 내각을 구성하였고 8월 15일 뜻깊은 광복절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분단국가 지도자
이승만이 남북 분단에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38선 획정과 미·소의 분할점령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 경향으로 볼 때 맥아더 장군 명령 1호에 의해 그어진 38선은 군사작전용이었으나 결국 정치적 분단으로 이어졌습니다.
분단의 책임은 과연 누가 더 의도적이었느냐에 따라 그 과중이 정해질 텐데요 북한지역을 소비에트화하고 사실상의 공산정권 수립을 주도한 소련이 가장 큰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두 번째 책임은 북한 김일성이 져야 할 것인데요 김일성은 그의 게릴라 항일투쟁 경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민족 및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실질적인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습니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에는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했으며, 1947년 2월에는 북조선 인민 위원회를 설치하여 정부 수립 절차를 완료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미국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최대 책임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에 무관심했다는 것이며 미국은 일제시대부터 한국보다는 일본과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가졌으며, 한국의 통일독립보다는 주변국 특히 소련과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대한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미국의 한국신탁통치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를 오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또한 미 국무부와 미군정 간의 원활한 정책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한국의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효과적으로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임은 이승만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승만의 철저한 반소, 반공 노선은 우익 경쟁자 및 좌파세력과의 정치적 협력과 협상에 있어 경직성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고 해서 이승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국내외 정세에 대한 정치적 판단력과 분석은 세계 어느 지도자에 못지않은 것이어서 결국 미국 정부도 이승만의 노선을 뒤 따르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은 본래 미국을 활용하여 통일독립을 성취하려고 하였으며 분단을 고착화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과도정부적 성격을 띤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데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현실주의적이었던 데 반해 김구의 통일 정부론은 이상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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