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왕건 왕의 리더십으로 고구려계승 실현 고려창업 왕건이야기

    지대넓얕/혜윰 / / 2020. 4. 2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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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을 받아들여준 건구자 궁예와의 내부 경쟁에서 어떻게 궁예를 이기고 고려를 세울 수 있었을까요?

    또한 국력이 앞서 가던 후백제 견훤을 제치고 어떻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까요?

    왕건은 궁예 시절부터 후삼국 쟁패 시절에 이르기까지 미약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하지만 점점 정국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데요 특유의 부하를 휘어잡는 포용 방식과 인재를 얻기 위해 겸손하게 고개 숙이는 왕재의 자질이 그에게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궁예는 명분이나 실력에서 후삼국의 지도자들을 훨씬 앞서고 있었습니다.

    신라 왕족의 후손에다 미륵불을 자처, 새로운 세계를 비전으로 제시한 그였기에 왕건은 896년 자신과 송악의 가문 모두의 운명을 궁예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궁예는 힘을 얻자 욕심이 커지면서 백성을 수탈하고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으며 왕건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데요 왕건을 통해 어떤 것들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천안박물관


    고려 창업주 태조 왕건

    고려 태조 왕건(877~943년)은 송악의 호족 집안 출신이며 할아버지는 장보고와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무역상 작제건이고 아버지는 금성 태수를 지낸 왕륭입니다.

    왕건은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일찍부터 궁예를 섬겼으며 훌륭한 무장으로 후고구려군을 이끌고 후백제군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궁예가 전제정치로 민심을 잃자 918년 동료 장군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요 이어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송악으로 환도했습니다.

     

    신라를 공격하고 약탈한 견훤과는 달리 신라에 대해 늘 호의적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그의 성공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935년 나라가 너무 쇠약해져 지탱할 힘이 없다고 판단한 신라 경순왕은 스스로 고려에 항복했고, 이 같은 평화적 합병은 고려의 국세를 크게 늘렸습니다.

    이듬해에는 아들과의 불화로 귀순해온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를 공격해서 정복하게 되는데 태조는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피폐한 사회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았고 관리들이 귀감으로 삼을 <정계>와 <계백료서>를 손수 저술했습니다.


    무리수 두지 않는 포용의 리더십

    왕건은 전쟁 수행 능력이 뛰어나고 탁월한 통솔력에 백성들의 신망도 차지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궁예를 넘어서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요 이 때문에 그는 무리하지 않고도 지도자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한편, 후백제 견훤은 농민 출신으로 서남해 방면의 방위군 무장으로 있다가 892년 농민반란군을 규합해 무진주(광주)를 공략하고 완산주(전주)까지 장학하는데 그는 이곳을 백제의 유업을 이어받고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세웁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면서 경애왕의 비빈들을 욕보이는 등 무력을 앞세운 강점과 침탈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는데 전쟁에선 이겼지만 적군의 백성들로부터 원수가 되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918년 6월 실정을 거듭하던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된 왕건은 국력이 미약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지만 서두르지 않고 민심부터 수습하기 시작하는데요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시대의 가혹한 조세를 낮춰주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렇듯 후삼국시대의 지배 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포용력이 왕건에게 있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으며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습니다.

     

     

    고려의 제 2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서경이 자리했던 평양 대동문

     


    좌절을 딛고 일어선 역사의 승자

    왕건은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열세를 면하지 못하는데요 공산 싸움(대구 팔공산)에서 왕건은 그가 가장 아끼던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을 잃고 겨우 죽음만 면하는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데 그냥 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라 민심을 기반으로 국가의 역량을 키우고 마지막 승부수를 띄울 준비를 합니다.

     

    비록 국력은 후백제보다 열세였지만 민심은 후백제에서 고려로 기울고 있었기에 930년 왕건은 고창(안동) 싸움에서 견훤의 주력부대와 사활을 건 전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후삼국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싸움이 되는데요 이때 왕건은 견훤을 간신히 이기며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역사학자들은 견훤이 백제 부흥을 표방했지만 겸손하기 못하여 신라왕들이 누리던 권력과 영화를 그대로 이어받으려다 백성의 불만을 샀고 신흥 호족세력들을 무시하고 영토와 권력 추구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을 패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는 가족경영조차 실패하여 넷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왕자들의 다툼에서 왕위를 잃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왕건은 935년 자식에게 축출된 견훤마저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는데요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의 항복도 받게 되었으니 적을 껴안는 포용의 힘이 무력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가장 어려울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기다릴 줄 아는 지혜, 적의 지도자까지 품는 넓은 마음으로 삼국의 통일을 이러 낸 것입니다.

     

     

    후삼국 통일 후 왕건이 창건한 충남 논산의 개태사 석탑과 용화대보궁

     


    내부의 적을 두루 품다

    그러나 왕건의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는데요 서로 원수가 되고 죽음을 불사하며 싸웠던 삼국의 유민들, 그리고 도처에서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지방호족들, 함께 싸웠지만 논공행상에만 관심을 가지는 부하 장수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비책이 나와야 했습니다.

     

    국론 통일부터가 급한 과제였는데요 이 시기 왕건 특유의 장점이 발휘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지방 호족들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결혼 정책으로 이들을 끌어들였으며 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고려 정권의 안정과 지방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위해 왕건이 벌인 혼인 정책이 통일 이후 정국 안정에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했지만 한반도 전역의 지배적 통일은 아니었습니다.

    대립하는 적국의 정권들을 소멸한 것뿐이지 실제 각 지방의 통치는 여전히 호족들의 손에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지방 호족들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어 언제든지 왕권에 도전하거나 거병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왕건은 그들을 일시에 통솔하려 서둘다가는 오히려 정권의 안정을 깨드릴 것으로 생각하며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들과 일단 군신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치고 토지와 백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재배권을 인정해주는 방법을 택합니다.

     

    왕건은 또 고려에 복속해 온 신라 후백제의 귀족과 호족에 대해서도 같은 화합 및 회유 정책을 펴 그들에게 상당한 지위와 식읍을 주어 대접하면서 새 왕조의 신하로 삼았고 가능하면 혼인 정책으로 인간적인 결연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제 각각이던 호족들과 삼국 유민들의 민심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건은 무술이나 언변, 부하를 사로잡는 카리스마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게 머리를 숙일 줄 알고 적들조차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정도의 '포용의 리더십'을 가졌으며 분란보다 화합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펼칠 수 있었기에 대업을 거머쥐었던 것입니다.

    왕건은 위기와 혼란이 다가올 때 내부의 적을 잠재우고 외부의 적을 껴안고 가는 '포용의 리더십'이야말로 이 시대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역사의 교훈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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