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으로 보는 리더십 닮고 싶은 조선 최고의 CEO(군주)

    지대넓얕/혜윰 / / 2020. 4. 14. 15:40
    반응형

    세종대왕으로 보는 리더십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은 공정하고 원칙적이며 따뜻한 배려와 소통 그리고 희생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 학습하고 실력을 갖춘 그렇기에 계속 진일보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이런 완벽에 까까운 리더를 찾을 수 있는데요 바로 조선의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은 왕자로 태어난 왕으로 32년을 살다가 54세에 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모든 면이 완벽한 리더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단 하루도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 못한 불행(?)한 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리더는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는 일보다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이 더 많은 자리이기 때문일 것인데요 그래서 리더의 고민은 언제나 진행형입니다.


    조선의 모든 왕이 닮고자 했던 군주

    세종은 조선 3대 왕인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큰형 양녕 대군 대신 세자가 되어 조선의 4대 왕으로 한글을 창제했으며,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개척해 국경을 정비하고, 박연과 장영실을 등용하는 등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정치적 풍파와 정적의 공격을 겪어야 했는데요 더구나 세종은 사소한 정책 하나도 힘으로 제정하고 집행하지 않고 타협과 소통 그리고 진정한 솔선수범을 통해 정착시켰습니다.

    그러기 위해 세종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괴롭혔으며 그의 이러한 마음가짐과 행동은 한 번의 어긋남 없이 재위 32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원료, 유학에 있어 이황이 그 근본이 되듯 조선의 모든 왕들이 세종의 정치를 이해하고 실행하려, 혹은 흉내 내려 노력했습니다.

    정조는 세종에 대한 경외심으로 세종 시대의 재현을 꿈꿔 조선의 마지막 르네상스를 펼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세종은 왕으로서 가장 위대한 시대를 연 인물이며 리더로서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던,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실권을 행사 할 수 없었습니다.

    태상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도전 세력들을 제거했기 때문인데요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세종의 장인, 심온이었습니다.

    심온은 처형당했고 그 식구들은 관비로 전락했으며 이를 지켜보는 세종의 마음은 편지 않았지만 권력의 냉정함을 이미 아버지 태종과 형 양녕 대군의 폐세자 처분을 보며 깨달은 바 있어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세종은 더욱 학문에 몰두했습니다.

    책을 읽고 이를 실행하는 방법을 찾을 것인데요 그러면서 자신의 세력을 양성하는 데도 소홀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현전으로 나타나는데요 세종 시대 집현전은 단순히 학문을 닦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서 한글 창제가 이루어졌지만 세종에게 집현전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친위대였습니다.

     

    젊고 유능한 학자들과 밤새 토론하고 경연을 열면서 점차 세종과 집현전의 젊은 인재들은 하나의 이상을 보게 되엇고, 가치관과 정치적 성향마저 닮아 갔다.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이개, 박팽년, 최항 등 수많은 인재들이 이곳을 거쳤고 훗날 세종을 이어 세조 시대까지 집현전 출신들의 활약은 계속되었습니다.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했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왕자의 건강을 걱정한 태종이 독서 금지령을 내리고 동궁전의 책을 숨겨 놓으라고 명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태종의 명에도 책을 읽는 데 열중했으며 한때 책이 없어 한 권을 무려 1000번을 정독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종의 학문에 대한 열성과 노력은 단순히 공부를 하는 것, 그 자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책과 경전 그리고 성현의 말씀과 철학은 물론이고 현실적인 학문에도 세종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요 그의 박식함은 음악과 과학 그리고 무기 제조와 인쇄 등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부분에까지 다양하게 발휘되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CEO

    세종이 왕으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이 죽은 해, 즉 왕위에 오른 지 5년째부터입니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몇 가지 유훈을 남기는데요 그 첫번째가 '형 양녕 대군을 죽이지 마라' 두 번째는 '양녕의 폐세자 처분을 반대하다 귀양 간 황희를 중용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세종에게 신하들은 양녕을 귀양 보낼 것을 간청했지만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에 정면으루 부딪칩니다.

    양녕을 폐하고 충녕에게 세자를 임명한 날 밤 아버지인 태종은 밤새 울었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세종은 구부도다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세종은 신하들과 타협하는데요 양녕을 경기도 이천으로 보내고 대신 황희를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세종은 보복의 정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죽은 당시 조정에는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유장현이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태종의 위세에 신하들이 심온 처형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신하들은 유장현이 살아남으리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온 사건을 거론하는 것을 기회로 세종이 신하들의 군기를 바짝 잡아 왕권을 강화하리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는데요 세종은 유장현을 좌의정으로 임명해 중용하고, 황희 등 자신의 반대파를 강하게 껴안는 포용의 정치, 배려의 정치 그리고 인의의 정치를 실천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고민도 많았겠지만 세종은 정치적 안정과 백성을 위한 정치로 큰 틀에서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또한 세종은 탁월한 용인술을 보였는데요 황희, 맹사성 등 경륜 있는 기존 세력과 집현전 출신의 젊은 인재들을 관료 조직의 실무진으로 배치함으로써 신구의 조화와 힘의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재들의 특성을 파악해 그들에게 맡는 전문적인 직책을 맡김으로써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처럼 보이는 황희 정승도 확고한 정치적 신념으로 행정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주었는데요 그런 화의에게는 인사와 행정을, 황희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하고 어질었던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문화를, 융통성이 뛰어나며 순발력이 좋은 윤회에게는 외교를, 그리고 강직한 김종서에게는 국방을 책임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세종은 신하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들이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인데요 또한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노비의 자식인 장영실을 중용해 천문과 과학 부분에서의 발전을 꾀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리더에게도 유구되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학연이나 리더의 개인적인 취향만으로 인사가 이뤄지는 조직은 죽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종의 노련한 정치적 안배와 통치는 당시 조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빠르게 만들어 내는 힘이 됩니다.

     

    또한 세종과 신하들은 격의 없는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대립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에 있어서는 중화사상과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하들과 날카롭게 대립을 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신하들은 결코 세종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과 신하라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전문성'에서도 세종을 넘어설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세종은 지배 계급이 글을 독점함으로써 피지배 계급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국가 경영보다는 쉬운 글을 만들어 모든 백성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깨닫고 비밀스럽게 조직을 운영해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거쳤고 마침내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지만 만만치 않은 반대에 봉착하기도 했습니다.

     

    세종이 평소 아끼던 신하들마저 한글 창제의 반대 논리를 거창하게 펴는데요 하지만 그들은 세종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세종은 유교적 가르침, 과학적 근거, 언어학적 논리 등 수많은 격론을 통해 한글을 발표합니다.


    준비된 실력의 리더십

    세종의 리더십의 기본은 전문성에 있습니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공부와 경연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안질환은 점점 심해져 재위 말년에는 앞에 있는 신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혈관 질환, 당뇨에 풍 질환까지 있어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고초를 겪습니다.

     

    그럼에도 세종의 백성을 위한 리더십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자 세종은 이를 자신의 부덕으로 여기며 신하들이 극구 반대하지만 경복궁 경회루 옆에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 기거하며 백성의 아픔을 함께한 것은 '공감'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또 다른 리더십을 찾는 다면 말과 행동의 일치입니다.

    세종은 제도와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예행연습을 통해 실수와 폐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언행을 조심하고 겸손하게 함으로써 신하들 특히 반대파의 목소리마저 수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인재 등용'에서도 세종은 해박한 지식과 원칙, 통치자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한번 등용된 인재에 대해서는 그가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 리더로서의 호방함으로 보이기도 했는데요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황희를 받아들여 무려 18년간 재상으로 중용했고 한 번 믿는 신하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를 보여 충성을 유도했습니다.

     

    이 같은 세종의 완벽에 가까운 리더십의 원천은 바로 '지식이 힘'입니다.

    세종은 즉흥적 발상에서 명령을 내리거나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토론을 통해 균형 감각을 갖추고 그것을 공론화해 수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심사숙고를 하고 이를 바르게 쓰이게 하는 데 그의 폭넓은 지식을 적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세종에 대한 신하들의 존경심은 더욱 강해져 갑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는데요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지적 해 달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연구해 보자"

    이러한 세종의 리서쉽이 있었기에 조선은 비로소 국가의 틀과 경영 시스템을 완성했고, 후대 왕들에게 '닮고 싶은 임금'의 전형이 탄생한 것입니다.


    사실 세종의 리더십을 오늘날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종의 리더십은 독보적이고 헌신적이며 본인에게는 대단한 고통이 따르기 때문인데요 게다가 당시의 왕조 게급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좁혀 보면 세종의 수많은 리더쉽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리더의 모습입니다.

    공부도 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도 챙기지 못한 채 옛날 경험으로 판단하고 지시하는 리더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요 혼자 자뻑 놀이나 하며 공부하지 않는 리더는 결코 리더로서의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